자린고비가 굴비를 공중에 매달고 한 숫갈 먹고 굴비 한 번 쳐다보며 밥을 먹는데 아들이 두 번 쳐다보니 자린고비가 하는 말이 '얘야, 물켤라. 굴비가 짜다!'
이 구두쇠가 맨 발로 걸어가다 멀찌감치에서 사람이 오면 신을 신고 가만히 서있는데 맨 발로 따라오던 아들은 신을 신고 걸어가다 그 사람이 먼 발치로 사라지면 신을 벗어 들고 갔습니다.
이 아버지는 아들에게 통제적 개방주의.
아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았겠지요.
그냥 냅두면 자유의지를 준 개방주의.
그러나 우리가 자식을 키울 때에 냅둘 수 없고, 그렇다고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일일히 따라다닐 수 없기에 내가 못하는 시간에 전능자에게 배우는 지혜, 말씀 안에 살게하면 좋을 성 싶습니다.
사물에 대한 언행에 '예, 아니요'를 취사선택하게 교육시키면 '오다 노부나가' 식이라고 하여 '새가 조롱 속에서 울지 않으면 죽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겠고, 대구 풀어주면 '울 때까지 기다리라'는 도꾸가와 이에야수식(式) 개방주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가운데, 통제적 개방주의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이 세상 사는데 필요한 친 인척 호칭법, 타인과의 예의범절과 기초학문에 있서서의 약속사항, 불안감과 우울증 예방법을 아는 데까지 일깨워주는 방법이 좋을듯 합니다.
과거의 순황(荀況. 순자)이 '삼밭에 나는 쑥은 붙잡아주지 않아도 위로 똑바로 자란다'고 말했듯이 저절로 잘 되리라는 맹자 역시 맹모삼천의 교육환경에 힘 입었다지요.
까닭은 성현 역시 '누구나 자기 스스로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 같습니다.-법구경 제 380장, 시편 17:4, 고후 6:16, ...
나타니앨 호손 작(作)의 그 아무 스승이 없섰던 어네스트가 착한 본성으로 큰 바위 얼굴상(像)이 되었던 까닭은 자유 속에서 책이라고는 성서뿐이기에 이 책이 달아지도록 읽었기 때문이라고 말해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준비된 영혼이란 자신과 보이지 않는 권능자, 또는 보이지 않는 스승과 마음이 통함으로서 관조, 경륜이었지 부모가 일일히 간섭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소득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자린고비는 적어도 아들이 신을 신고 혼자 걸을 수 있게 해주었지 않았습니까?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