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이 해 먹자는데 법자(法咨)님은 도둑을 안 맞을 재간이 있오?
그 홍길동전에 탐관오리 집안방에 세도가 부부가 깔고 자는 요를 훔쳐가겠다고 통고하더니 3일 후에 포졸이 지쳐 다들 졸고 있을 때에 홍길동이 안방으로 들어가 그 영감과 마누라 사이에 끼어들어 누어 좌우로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여 년놈들을 요 밖으로 밀어낸 후 요를 걷어 들고 나가더랍니다.
그 장자莊子라는 책, 사기史記라는 것에 수하 9천명을 거느린 두목 도척盜跖이 나오는데 자기 형의 친구인 공자가 훈계하러 가서 오히려 말빤지에 된코 맞고 나왔다는 바 힘의 논리에 당해낼 수 없었던 까닭. 법자님은 말빤지와 힘의 논리를 당해낼 자신이 있겠오?
그 수양대군이 혈족간에 왕권투쟁싸움을 일으킬 법하다는 걸 장손이 아닌 세종대왕이 눈치채고, 황희에게, 황희는 자신이 죽기 전에 김종서에게 부탁하며 김종서 성질누구러뜨리기 작전을 폅니다.
세종(世宗), 세조(世祖)에서의 '세(世)'는 장손이 아니라는 뜻, 종(宗)은 정치기반을 잡을 때에, 조(祖)는 전쟁(예: 세조의 이시애 난 평정) 왕이란 뜻. 마치 쿠빌라이칸이 지손의 지손, 즉 맏상제(喪制)가 아니기에 '세조'라 불리어지듯 말입니다.
그 김종서는 바람둥이 양녕대군을 대명률에 의해 처벌하자고 계속 고집을 편 대쪽같은 성질이기에 세종이 "짐이 15번 말을 안들었는 바, 원래는 왕이 3번이나 말을 안들으면 신하가 사직하라고 써있지 않더냐?"라고 권고사직하고픈 맘이 없느냐고 하문할 정도로 꼬장꼬장한 장군인데 이 김종서를 수양대군이 죽여 큰 불부터 끄죠.
그리고 등등 정인지, 신숙주, 도승지 신수근. 윤필상, 유자광 등 통칭 훈구파 문무백관을 자기 앞으로 끌어드리고 사륙신, 생륙신 혹 생칠신 12~13명 없어도 정사를 꾸려나갈 자신있는 패역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도적놈에게 단종이 밀려날 수 밖에. 이 단종을 죽인 세조 3년 10월에 영남학파 유림 김종직이 세조를 비난하는 조의제문을 썼는 데 후일 김종직이 죽어 묻힌 무덤에서 시신의 목을 잘라버리지요(연산군조).
또 한 번은 세조가 등극하자 전례에 없이 왕들의 역사 사초(史草)를 뒤져 읽어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 권씨를 잠자자고 부르는 걸 거절받은 사건이 기록된 걸 알고 또 살륙사건의 빌미가 됩니다.
그러나 수양대군 세조는 기둥서방으로 누굴 내세웠다가 토사구팽시키는 한고조 유방/한신, 박정희/장도영, 전두환/허삼수ㆍ허화평 짓은 안 합니다.
법자님은 이런 대세에 한명회처럼 권도를 펴겠읍니까, 성삼문 같겠읍니까? 작정한 도적 홍길동에게 요를 안 뺐길 자신이 있겠읍니까? 군사혁명에 땡크 앞에서 광화문에서, 반대 시위하다 깔릴 각오가 있읍니까?
사륙신의 한 분 성삼문이 그 수양대군의 찬탈기미를 알고 있었지만 그의 인생전후에 지은 시조 두 세 편의 의미가 서로 반대이거나 차츰 메타몰포시스 합니다.
첫 번째 시조: (이성계) 역성혁명을 고려왕조 신하 정몽주, 최영, 두문동 70인이 감히 이성계를 그르다고 말 할 수 없으니 시의를 따르자는 시조. 의(義)는 시의에 따라 변한다는 의미. ▲그 때 당년에(백이ㆍ숙제가) 말고삐를 두두리고서 (은나라를 정벌하려고 진군하는 무왕과 강태공에게 문왕의 탈상이 끝나기도 전에 신하로써 반역함을 탓하며) 감히 그른 것을 말하니, 그 큰 옳음이 당당하여 해와 달과 같이 빛났도다. (그러나 결국에 은나라가 망해) 풀과 나무도 주나라의 비와 이슬에 젖어 자랐으니, 그대의 오히려 수양산 고사리를 먹은 것이 부끄러우니라. ㅡ수양미(首陽薇)
두 번째 시조: 충신불사이군 충의(忠義)의 지조를 읊픈 시조: ▲이 몸이 죽어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ㅡ충의가(忠義歌)
세 번째 시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인생허무에 대한 시조 ▲북을 쳐서 사람의 목숨을 재촉하니 서쪽 바람에 해는 기울려고 하는데 죽음의 길에 객이 쉬어갈 집이 없으니 오늘 저녁에는 누구의 집에서 잘 것인가?ㅡ부절명시(賦絶命詩);목숨을 끊는 데 붙이는 시. 조두현 편저 한문시 p. 160, 169
▲그럼 법자의 진충보국 절개가 시의에 따라 도둑맞지 않을 재간이 있읍니까?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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