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야 된다!
한(恨)도 잊고 설음도 잊고 귀, 코, 손발 잘린 원한도 잊고 쓸개 빼고 간을 빼야 맴이 편안하도다!
전주곡(overture);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나~았네♪ 처엉산에 홀로 서 있는 천년 소나~무야~아! .."
♡ 종군위안부, 징용간 사람, 나머지 식구.
정부관료 사대부는 전쟁이 끝나도 민중에게서 가렴주구 착취로 잃은 게 하나도 없다, 특히 김일성 도당. 이너마 자슥은 한일회담에 관심 껐다.
온갖 음모와 감언이설로 미국을 속여 넘겨 미군을 철수케 하고는 남침해 온 것.
그저 죽어나느니 소시민.
전혀 모르는 다음 세대들이 부모를 이해못하는 엉뚱한 발언, 앙팡테러블. "그 지나간 옛날 일을 왜 해요. 서로 잘 살아야지요. 선진국가 일본을 배우기나 하세요!" ♨
그 1957년! 김유택 전 한은총재가 처음 개설한 일본대사관 (초대)대사로 부임함과 동시에 일본 수상 기시 노브스케(안신개岸信介),
외무대신 후지야마 아이이지로(등산애일랑藤山愛一郞)씨를 상대로, 1953년 10월에 결렬된 한일회담 재개에 노력한 결과
1957년 12월 31일, 일본 동경에서 예비회담을 끝내고 네가지 문서에 김유택 대사와 후지야마 외무대신이 조인하고,
다음 별항과 같이 공동성명서를 내게 되었다.
공동성명서 내용의 동시 골짜 중의 하나는 (발췌개헌안으로 이승만이 8월 13일 제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나라가 시끄러울 때에, 아이젠하우워 대통령이 12월 3일에 방한하여 여론을 위로한 효과가 조금 있섰음)
"(한국이 소란한 이 때를 틈타서)1952년 10월 15일 일본 수석대표 구보다 관이지로(구보전관일랑久保田貫一郞)가 행한 발언을 철회하고,
또한 1951년 3월 6일 일본대표단이 한국내 재산에 관한 청구를 (1957년 12월 31일자 한일회담에 때 맞춰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한) 미국 정부각서에 의거하여 철퇴할 것을 대한민국 정부에 통고했다. .." Ω
제가 거론하는 욧점은 그 후 한일양국이 이러한 역사를 모르고 서로 얼토당토 않게 외교노선을 바꿔가는데 최하 수위로 떨어진 때가 김대중 정권이었다 뼈아프게 느끼는 겁니다.
우리 외교전략은 미국과의 여러가지 상호동맹을 일본보다 공고히 다지는 일입니다.
일본점령군사령관 맥아더:이승만라인이 선포됬음에도 우리에게 암 말 않했음.
한국 육사를 창설해준 벤프리트 장군, <한국동란사>를 저술한 클라크 유엔사,
친한파였습니다.
그 아이젠하우워가 임기 끝내고 몇 달 후에 기자가 물었습니다.
"백악관을 떠나면 골프하는데 달라지는 게 있다고 여깁니까"라고 묻자 "그야 물론이죠. 나를 갈기는 골프공이 많이 날아 올테니까!"
그러나 유태계 키신저? (제게 '키신저 전기¹'가 있읍니다만) 이승만 영해라인을 부정하고,
일본을 서태평양 교두보로 설정하고 우리나라는 공산국가로부터의 공격받는 전초전 나라로 몰락시켰음.
이상하게 유태계 고문이 미영불소, 중국일본에 있는데 우리와는 궁합(?)이 영 않맞나 봅니다.
제가 이래서 <유대사상>, <유대인이 되는 길>을 읽으면서도 덕산에 있는 흥선대원군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하려던 '오페르트'(유태계 독일 상인)에게 "왜 도굴하느냐"고 물으니까 "기독교를 허가해주면 않 파지"라기에 내 참 .. 기가 막혀, 주욱 유태계룰 존경하다가도 은근히 경멸합니다만. ㅋ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유대교회를 나가면서 왜 예수 이름을 팔아!
이 유태인 넘 오페르트(Opert, Ernest Jacob. 1832-?)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묘 발굴품을 미끼로 기독교를 한국에 전파되게 허락하면 되돌려준다면서 고종 5년(1868)에 조선 선교사 페롱(Feron 權 신부), 미국인 젠킨스(Jenkins)와 호벼 파려다가 바닷물이 썰물(退潮)로 변해감을 알고는 허겁지겁 배에 올라타고 내뺌.
그러나 이 유태인을 고문으로 촉탁해야 합니다!
라틴어에 "유태인이라면 몰라도 누가 내 말을 곧이 듣겠나?"란 용인술 격언이 있거들랑요?-Credat Judaeus Apella!
외교술에서 주다 벤허 찰튼 헤스턴, 모세 찰튼 헤스턴을 연상하면 됩니다! ㅋ
¹. Marvin Karb and Bernard Karb. KISSINGER. p. 276 Little, Brown And Company 577페이지 분량, 1974
"On Japan, the U.S. placed "the highest value on its friendly relations" with its Assian ally, while the Chinese "firmly" opposed "the revival and outward expansion of Japanese milita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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