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1950년 2월 16일 이승만(75세)이 방일시에 맥아더 장군의 초청으로 파티에 모인 길전수상과 비공식 회담을 하는 석상에서 이박사에게 한 질문.
이에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이 모조리 잡아가서 지금은 한 마리도 없다. .."고 대답하자 길전 수상이 그만 말문이 막혀 다음 말을 잊었다 한다.
한국 고유의 보물과 문화가 모두 사라졌다는 조크였지요.
제가 이 실화를 왜 올리는가 하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일본 외교술은 전술의 연장이란 말씀을 올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1943년 이승만 박사는 하와이 거류 교포가 갹출한 한미후원금을 수령하여 8월 30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2,625.35불을 보내고 국제적십자사에 429.50불을 보냅니다.
까닭은 그 당시 국제전운에 1934년 12월 일본이 워싱턴해군조약 폐기를 미국에 통고했지만 미국은 국제여론을 조성하여 그로부터 3년 후 10월에 국제연맹이사회에서 일본을 침략국으로 의결하고 나서 다시 2년 후 7월에 일본에 미일통상조약 폐기를 통고(1939)합니다.
일본은 미국과 협정한 모든 조약을 폐기한 후 1941. 12. 7 일요일을 기해 진주만을 급습.
이 와중에 이승만 박사는 힘도 모자라고 정의롭지 못한 일본 대신에 조국광복을 위해 강대국 미국에 접근한 것이지요.
여기서 이야기가 잠시 뛰지만,
자신의 영달과 장기집권을 위해 팽덕회 중공군 사령관이 대군을 이끌고 남한을 낙동강까지 1ㆍ4후퇴시켜준 은공으로 백두산 북편으로 절반을 중공에게 갈라준 김일성이나,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다며 독도연해에서 일본어부들에게 공동어로구역을 설정해준 김대중이 그래서 못 쓴다는 겁니다.
이런 짓은 극우파에 의해 저격사감.
"뭐가 '그래서', 예를 올려 보죠!"
"예-. 아이리쉬 예를 들겠습니다. 아이리쉬 국민지도자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1890-1922). 설흔 두살에 저격당합니다.
1921년 영국대표 F.E. Smith와 영토분할담판에서 Ulster지역을 영국령으로 그대로 두기로 하고도 섬을 두 쪽으로 갈라가진 협정에 싸인을 하면서 스미스가 '나는 이로써 정치생명은 끝났다'라자 콜린즈가 '나는 이거로 나의 생명은 끝났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쿨린즈는 8개월 후에 공화죄파 극단주의자에게 저격받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대일 외교의 프로필:
그래서 이박사는 외견상으로는 어쨋던 노령에도 불구하고 세 차례 일본을 방문.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침략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제국적 우월감으로 오만무례한 태도로 터무니 없는 이기적 주장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분노를 살 뿐만 아니라 한일회담이 결렬되곤 함에 안타까움.
그들은 미ㆍ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이미 무효로 된 재한 일인 재산권을 주장하고, 한국의 영토임이 뚜렷한 독도를 제 나라땅이라고 주장하며 또 국제공해법에 의거하여 선포한 이승만 해안라인 평화선을 인정치 않겠다고 주장하는 한 한일국교수교는 어렵다고 예견.
그 후 한일회담의 재개를 위한 에리슨 주일대사의 분위기 조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국제정세가 좀 더 자국에게 유리하게 되고 군비가 좀 더 강화할 때까지 질질 끌고 있는 모양으로 조금도 성의를 보이지 않고 러시아, 중공 그리고 북한과 손을 잡을 기세를 보여 한국을 위협하면서 미국에게 자기네에 유리하도록 자기네 편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섰다. 이게 사람 누구 놀리는가!
그러던 중 일본어선이 우리 해역을 침범하자 한국 연합참모본부의 <발포와 격침의 성명>은 일본 조야를 자극하여 기독교사회주의자, 일본 자민당 고문 하천풍언(賀川豊彦)씨는 일본인을 대표하여 공한으로써 이대통령에게 사과 겸 관대한 용서를 요청해 왔는데 다윗을 들먹인 그 맨 말 끝이 요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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