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varia lectio)의 멋진 애인(sapid lover).
그들은 하늘을 날아 운우의 정을 나누며, ..
서울 풍수가 국가 강령(康寧)에 미치는 효과.
서울의 풍수.
관중이 잡아준 중국 풍수 누경의 용호귀작,
인도의 바추사스트라(Vaastu Shastra) 상(象).
서울의 풍수.
정담한 여인과 근골의 체성(體性) 감각.
잘 생긴 여인은 발부 표준 팔등신에 따르지만 이태백에 의하면 풍수에 정해진 표준은 없다지만 경복궁 터는 아무리 보아도 여인의 잠지상(象).
풍수의 산 줄기는 옷벗고 누어 하늘을 올려다보는 젊은 남자상(象).
젊은이의 잠지자리, 명당.
신라 말기에 도선대사가 보아 온 서울 풍수 용봉의 삼각산 줄기.
그는 쇄왕론에서 인왕산을, 도참비보설에서 광화문 자리에 관심을 두었다.
당파에 피를 많이 흘리는 서울의 경복궁 터.
인걸이 융합되지 않아 수양대군 이후 한 두번 피 흘린 궁전이 아님.사대사화는 물론, 명종 8년(1553년)에 불이 나 이듬 해에 개수하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에 불타고 고종 4년(1867년)에 당백전 발행으로 흥선대원군이 재건.
그 개국 503년 갑오경장(1894년) 때 고종은 포도청을 경찰사무소로 바꾸고 경무청이라 이름했고 이어 일본이 고종 대한 11년(1907년) 12월에 고종을 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시키고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를 조선통감으로 기용한다.
메이지(명치) 42년(1909년)에 이또 히로부미 능력을 인정하여 동북 아시아 전진기지를 구축하고자 이또 히로부미를 현직해임.
그리고 선비들이 과거를 보던 경복궁 후원에 총독부에서 경무대를 지어 삼각산 혈맥을 끊고 소화 9년 7월에 경복궁을 일본의 종묘로 생각하고 명당 대묘자리에 총독부청사 기공식. 총독 데라우찌(사내정의), 하세가와(장곡천호도)로 총독이 이어진다.
그 경무대를 윤보선대통령이 청와대로 개칭함.
경복궁 앞에 일본 대묘터를 택하여 총독부 청사를 짓고 궁성지세를 문묘로 일본종묘풍으로 개조하여 일본 역대 천황의 사당으로.
그런데 능원에서 앞 채를 '묘', 뒷 채를 '침'.
그러므로 미련하게도 제사지내는 묘소에서 총독부가 사무를 본 셈.
순종 2년(1908년)에 궁궐안을 둘 쑤셔 창경궁 서원의 금위영을 폐지하고 고종 13년(1876년) 절일첩에 구로다 기요다가(흑전청륭)는 풍수의 기를 꺽으려고 창경궁 동원에 박물관, 우수마발 짐승의 똥오줌 냄새나는 동물원을 짓는다.
서울 터에서 난리는 한 두 번이 아님.
관료들이 공평무사한 마음이 보이지 않고 오호라 당파싸움.
숙종 원년(1675년)에는허적의 유약사건, 송창민의 석곡봉사, 김육의 기묘록.
고려 숙종(4년. 1099년)이 친히 삼각산에 행행하여 도지(도읍지)의 입지 여부를 조사했고, 이 입지조건에 대하여 무학대사가 이성계와 재확인하고 도읍을 정한 서울 터.
한양대 남쪽 벼랑및 살꽂이 돌다리에서 '왕 십리'(십리를 가라)해도 경복궁은 태방.
오른 쪽에서 머리가 시작하여 왼 쪽으로 좌청룡 낙산 아래 창경궁. 태양 육십칠 건방을 등지고 십칠익 박태 손방을 향한 좌향.
24방위의 21번 째 오행유속 토음 궁전.
45도 각거리에서 북악에 서녘그림자를 주는 인왕산이 너무 가깝다.
본능의 원형을 살리는 미적 감각. 성형수술은 운명을 바꾼다.
숭례문에서 청파로 땅을 파고 청계물을 용산으로 흐르게 하시요.
국고가 없는데 어떻게? 청계천이란 이름은 진시황의 아방궁 대운하 한 줄기 이름이 청계천.
범철관의 24방위 제 15번 째 오행유속 목양궁전.
태조 3년에 크고 넓게 지은 갑제 경복궁, 그래도 힘이 약하다.
아무리 봐도 노음 구기 간방을 등지고 13정 고승 곤방을 향한 좌향.
그래도 왕권으로 나쁜 풍수를 헤쳐나가야 할 게 아닙니까!
그리하여 사대사화 역사에 탈진한 성종 때에 와룡동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원서동에 돈화문 창덕궁을 짓고 역대의 왕들이 창덕궁에 상주하고 정사를 보았음.
그들은 마파람에 실려 북악산 구름 위로 솟구쳐 삼각산을 보고 내려 쏟는 재넘이바람(mountain wind)을 타고 인당의 청와대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