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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인:故박정희 메타몰포시스. 쐐기박음<댓글>
글쓴이 : dkp 날짜 : 2012-08-09 (목) 13:41 조회 : 924
우선 자리부터 잡고요. ^-^ 12852. 번호 좋습니다.

12847 kwang oh park <오정인 온뉴스 대표님 석방을 청원합니다>에 댓글; 

근자 故 박통과 대선출마 의향이 있서보이는 영애 박근혜는 서로 분명히 다름에도 이기일원론처럼 묶어 보려는 트렌드에 대해 언론인 오정인氏가 때렸다.

옳은 내용.

하지만 선거를 앞두고 시의에 않 맞게 흑막을 터트린 것 같이 냄새나지만 사실보다 악평한 것이 아니라 역사 사실대로 보도함에 언론의 자유를 충분히 인정함.

즉, 고 박통의 영애라는 점에서 부친을 등에 업고 있는 듯한 노끈이론을 도저히 반박할 수 없겠다 싶음과 동시에 

그 알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진 위정자들에 의해, 
(까닭은 통치권력에서 육법전서를 웃도는 정보요원 공권행사, 군경 병력을 빼면 노무현 잔임기간처럼 무능력해짐) 

언론인이 구금됨을 가르켜 '권력형성과정 및 주리어스 시저에 이르는 권력인맥의 당위성을 제고하여 옥타비아누스가 종신황제로 옹립되어야 함을 강조한 버질의 작품'을 논단자 "오비드(Ovid)씨가 '변형'(Metamorphoses) 미케니즘이라고 폭로한 후, 막상 당사자인 옥타비아누스는 나타나지 않고 그 알지 못하는 압력에 의해 오비드가 쉬흔 살에 흑해 Tomi로 추방되는 경우와 비교할 수 있으리라. 

그가 추방되면서

┏ 
"And now I close my work, which not the ire

Of Jove, nor tooth of time, nor sword, nor fire

Shall bring to nought. Come when it will that day

Which o'der the body, not the mind, has away,

And snatch the remnant the stars shall soar,

And my reknown endure forevermore.

Where'er the Roman arms and arts shall spread,

There by the people shall my book be read;

And, if aught true in poet's visions be

My name and fame have immortality."

┛ BULFINCH'S MYTHOLOGY p. 308-310 Thomas Y. Crowell Publishers 1834


sunny 2012-08-10 (금) 13:19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이(理)를 기(氣)에 내재하는 원리나 법칙성으로만 파악하는 견해.

성리학에서는 사람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존재와 운동을 와 라는 서로 다른 2가지 근본 원리에 의해 설명하는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은 이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이기이원론이 이와 기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이가 기보다 먼저 존재하면서 기를 낳는다거나 이는 기 바깥에 독립해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하는 데 반해, 이기일원론은 이러한 견해를 거부한다. 이기일원론에서는 이와 기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 양자의 상호의존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특히 이는 기에 내재하는 원리나 법칙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기의 관계를 이렇게 파악하는 점에서 이기일원론은 기일원론(氣一元論)과 유사한 점이 있다. 그러나 기일원론에서는, 이가 기와는 구별되는 별개의 실재이면서 기와 함께 만물의 생성과 운동에 관여하는 근본적 원리라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라는 별개의 실재가 기에 내재하여 그 원리나 법칙성이 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기 스스로의 올바른 법칙성이나 기 스스로가 바르게 작용하도록 하는 원리를 가리켜 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기일원론은 만물의 존재와 운동을 낳게 하는 궁극적 원리나 근원적 존재로서 기 하나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기일원론에서는 그러한 궁극적 원리나 근원적 존재로 이와 기라는 서로 다른 2가지 실재를 인정하는데, 다만 그 이가 기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이라는 것은 항상 기 속에 있으면서 기의 존재와 운동을 주재하는 원리이거나 법칙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기일원론의 정확한 개념은 이기이원적 일원론(理氣二元的一元論)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국의 성리학자 가운데 이러한 이기일원론을 정립한 대표적인 학자는 명대(明代)의 나흠순(羅欽順)이며, 조선의 성리학자 가운데서는 이이(李珥)를 들 수 있다.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과 대비하여 전자는 주기론(主氣論), 후자는 주리론(主理論)이라고 한다.

주기론과 주리론은 이와 기를 세계의 근원적 존재로 인정하며, 그 이와 기의 상호관계에 의해 만물이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점, 이·기에 관한 가치론적 설명에서 기보다 이를 중요시한다는 점이 동일하다. 그러나 이·기의 분개(分開)와 혼륜(混淪)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보듯이, 주리론이 '이기결시이물'(理氣決是二物)이라는 분개의 측면을 강조하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기원불상리'(理氣元不相離)라는 혼륜의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주기론에서 이는 기와 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별개의 실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기의 법칙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또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서 주리론은 이를 형태는 없으나 운동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는 데 반해, 주기론은 이의 운동능력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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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2-08-10 (금) 13:23

노끈이론


고양이가발을뻗으면닿을만한거리에노끈이매달려있으면고양이는그걸잡으려안달하지만줄을내려서두발앞에놓아주면흥미를잃는,밀고당기기의연애전술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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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2-08-10 (금)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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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2-08-10 (금) 13:34

Map of the Roman Empire - Tomi

Tomi
N-3 on the Map

Ancient Tomi -  A city on the western shore of the Euxine (Black Sea) famous for being the place of Ovid's banishment. Ovid regarded Tomis as utterly remote from civilization (i.e. from Rome). Now the oldest city of Romania. Constanta.

Tomi or Tomis. Now Tomiswar or Jegni Pangola; a town of Thrace (subsequently Moesia), situated on the western shore of the Euxine, and at a later time the capital of Scythia Minor. It is renowned as the place of Ovid's banishment. See Ovidius. - Harry Thurston Peck. Harpers Dictionary of Classical Antiquities.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Constanţa (Romanian pronunciation: [konˈstant͡sa]; historical names: Tomis, Greek: Κωνστάντια or Konstantia, Turkish: Köstence, Bulgarian: Кюстенджа or Kyustendzha) is the oldest living city in Romania, founded around 600 BC. The city is located in the Dobruja region of Romania, on the Black Sea coast. It is the capital of Constanţa County and the largest city in the region...The Port of Constanţa has an area of 39.26 km2 (15.16 sq mi) and a length of about 30 km (19 mi). It is the largest port on the Black Sea, and one of the largest ports in Europe.

History of Tomi. Tomis (also called Tomi) was a Greek colony in the province of Scythia Minor on the Black Sea shore, founded around 600 BC for commercial exchanges with the local Getic populations. The name may likely be derived from Greek Τομή meaning cutpiece, section. According to one myth dating from Antiquity, found in the Bibliotheca, it was founded by Aeetes: "When Aeetes discovered the daring deeds done by Medea, he started off in pursuit of the ship; but when she saw him near, Medea murdered her brother and cutting him limb from limb threw the pieces into the deep. Gathering the child's limbs, Aeetes fell behind in the pursuit; wherefore he turned back, and, having buried the rescued limbs of his child, he called the place Tomi." Another legend is recorded by Jordanes (after Cassiodorus), who ascribes the foundation of the city to a Getae queen (The origin and deeds of the Goths): "After achieving this victory (against Cyrus the Great) and winning so much booty from her enemies, Queen Tomyris crossed over into that part of Moesia which is now called Lesser Scythia - a name borrowed from Great Scythia -, and built on the Moesian shore of the Black Sea the city of Tomi, named after herself." In 29 BC the Romans captured the region from the Odryses, and annexed it as far as the Danube, under the name of Limes Scythicus. In AD 8, the Roman poet Ovid (43 BC-17) was banished here by Augustus, where he found his death eight years later. He laments his exile in Tomis in his poems: Tristia and Epistulae Ex Ponto. Tomis was "by his account a town located in a war-stricken cultural wasteland on the remotest margins of the empire". A statue of Ovid stands in the Ovid Square (Piaţa Ovidiu) of Constanţa, in front of the History Museum. A number of inscriptions found in the city and its vicinity show that Constanţa lies where Tomis once stood. - Wikipedia

Tomi (Tomis, Miletis, Metropolis), a town of Moesia Inferior, on the Euxine, bet. Constantiana and Callatis. A Milesian colony. The place of Ovid's banishment. Named from the mangled remains of Ap6yrtus. Near it is a lake called Ouvidouve Jesero, " lake of Ovid." Babba.  Classical Gazett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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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2-08-10 (금) 13:37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Augustus ; BC63.9.23~AD14.8.19)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재위 BC 27∼AD 14)로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회복된 공화정의 수반을 뜻하는 '프린켑스'(제1시민)로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원수정(元首政)으로 알려졌지만,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로마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교묘하게 효율적으로 관리했으며, 그리스·로마 세계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남동쪽 벨리트라이(벨레트리)의 유서 깊고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BC 59 죽음)는 옥타비우스 집안에서 맨 처음으로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된 인물로, 해마다 선거로 임명하는 프라이토르(법무관)에 뽑힌 적도 있었다. 이 행정관직은 로마의 관직서열에서 콘술(집정관)에 이어 2번째로 높은 자리였다. 어머니 아티아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누이인 율리아의 딸이었고, 어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카이사르의 도움이 컸다.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정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2세 때 외할머니 율리아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연설하면서였다. 그후 3, 4년 뒤에 그는 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된 대신관단(pontifices)의 일원이 되었는데, 대신관(pontifex maximus)은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BC 46년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서 정적들을 무찌르고 로마로 개선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독재자가 된 카이사르를 수행하여 개선 행진에 참여했다. 이듬해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도 스페인(히스파니아)으로 가서 카이사르와 합류했다. BC 44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을 때 그는 학문과 군사교육을 마치기 위해 아폴로니아(지금의 알바니아에 있음)에 가 있었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유언을 통해 그를 양자이자 제1상속자로 삼았다는 말을 들었다. 의붓아버지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말렸음에도 그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유언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당장 로마로 향했다. 이때 그는 불과 18세였다. 카이사르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카이사르의 문서와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카이사르의 제1상속자가 되리라는 기대가 빗나가자 카이사르의 재산을 옥타비아누스에게 한 푼도 넘겨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그리고 죽은 독재자가 로마 시민에게 빚진 유산도 옥타비아누스가 재주껏 갚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옥타비아누스를 무시하고 동부지역으로 떠났다. 로마의 주요 원로정치가인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는 옥타비아누스를 이용하고 싶어했지만 그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마련했던 대중오락을 찬양함으로써 카이사르 군대의 충성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원로원은 키케로의 권유에 따라 안토니우스와 결별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원조를 요청했으며(또한 원로원은 젊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원로원 의원 자리를 주었음), 무티나(모데나)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해 안토니우스를 갈리아 지방으로 몰아냈다. 원로원 군대를 지휘한 콘술들이 목숨을 잃자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공석이 된 콘술 자리 가운데 하나를 옥타비아누스에게 주도록 원로원 의원들을 강요했다. 이어서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정식 승인을 받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비롯해 카이사르 뒤를 이어 대신관이 된 레피두스와 곧 협정을 맺었다. BC 43년 11월 27일, 세 사람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5년 임기의 3인 집정관으로서 독재관으로 정식 임명되었다(제2차 삼두정, 제1차 삼두정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및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맺은 비공식 협정을 말함). 로마의 동부지역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점령하고 있어서 세 집정관은 서부지역을 셋으로 나누었다. 그들은 '처벌해야 할' 정적의 명단을 만들고, 안토니우스의 적인 키케로를 포함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그보다 한 계급 아래인 2,000명의 기사들을 처형했다. BC 42년 1월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제국의 신으로 인정받자 신의 아들로서 옥타비아누스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와 안토니우스는 아드리아 해를 건너 동부로 진격했고, 안토니우스가 지휘하는 군대(옥타비아누스는 당시 병중이었음)는 2차례의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싸움에 패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둘 다 자살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안토니우스에게 동부(갈리아 지방 포함)를 배당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군대에서 제대한 군인들이 정착문제를 둘러싸고 말썽을 부리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형제와 아내를 상대로 페루시아(지금의 페루자)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시칠리아 섬과 해상 통로를 장악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대폼페이우스의 아들)는 또하나의 잠재적인 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친척인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했다(그러나 얼마 후 성격 차이로 이혼했음). 페루시아 전쟁 이후 섹스투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인척이 된 뒤에도 안토니우스에 대한 접근을 단념하지 않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제의를 거절하고 브룬디시움 조약에서 옥타비아누스와 새로운 합의에 도달했다. 이 조약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레피두스가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를 제외한 서부 전체와 이탈리아를 차지하게 되었다. 동부는 다시 안토니우스에게 돌아갔고, 겨울을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 여왕과 함께 보낸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로마 제국 사람들은 이 조약이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의 종식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모두 기뻐했다. BC 38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함으로써 귀족계급과 중요하고 새로운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 화해하는 데 실패한 옥타비아누스는 곧이어 섹스투스와 일련의 전투에 빠져들고 말았다. 섹스투스의 근거지인 시칠리아 섬에 대한 최초의 공격이 참패로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BC 37년에 타렌툼(타란토)에서 안토니우스와 새로운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전함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의 동부와 국경이 맞닿아 있는 파르티아 및 그 동맹국인 메디아와 전쟁이 일어나면 필요한 육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전함을 보내주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끝내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 조약은 또한 BC 33년말까지 5년 동안 제2차 삼두정치를 연장한다고 규정했다.

  이듬해에는 세력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동부 원정에서 실패했지만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시칠리아의 나울로쿠스 곶(베네티코 곶) 앞바다에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완전히 격파했다. 이 함대를 지휘한 사람은 일찍이 옥타비아누스의 동급생이었고 유력한 귀족들한테는 인기가 없었지만 천재적인 함대 사령관이던 마르쿠스 아그리파였다. 이무렵 옥타비아누스에게 무력으로 대항하려던 레피두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무장해제당하고 콘술의 지위마저 박탈당해 결국 은퇴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에게는 퇴역군인들을 이탈리아에 정착시키고 신병을 모집할 권리가 있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무시한 채 안토니우스 군단에 딸린 많은 병사들을 멋대로 제대시키고 그들에게 정착촌을 세워주었다. 그가 로마 세계의 궁극적인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안토니우스와 경쟁한다는 사실은 차츰 분명해졌다. 안토니우스가 로마와 별로 관계 없는 디오니소스(바코스)를 수호신으로 삼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옥타비아누스는 고대 로마의 '질서의 신'인 아폴론을 수호신으로 삼아 자신의 애국심을 종교적으로 교묘히 선전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옥타비아누스는 탁월한 지휘관임을 암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 앞에 개선장군(Imperator)이라는 칭호를 붙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다.

  BC 32년에 삼두정치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고,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는 더이상 콘술의 권한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증오에 가득찬 선전이 오가는 가운데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하자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해로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두 지도자는 제각기 휘하의 사람들을 설득해 충성 맹세를 정식으로 받아냈다. 그러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그리스 서해안 일대의 거점을 지키기 위해 함대와 육군을 투입했다. 그러나 BC 31년초에 옥타비아누스는 재빨리 아그리파를 파견하여 그리스 남서쪽 끝에 있는 메토네를 점령해 선수를 쳤다. 친구이자 조언자인 마이케나스에게 이탈리아를 맡겨놓고 전쟁터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암브라키아(아르타) 만에 가두어버렸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배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듬해 이집트를 점령하자 자살하고 말았다.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낳았다고 주장한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 카이사르(카이사리온)를 처형하고, 이집트를 병합하여 직접 지배했다. 그는 클레오파트라의 보물을 압수한 덕분에 제대군인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었고, 이 보물을 발판으로 하여 마침내 그리스·로마 세계 전체의 주인이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차츰 자신이 절대권력을 지니는 원수정체제의 확립을 위해 일련의 조치를 취해나갔다. 그는 60개 군단을 28개로 줄이고, 대부분 이탈리아인인 15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는 한편, 속주에서 데려온 15만 명의 외인부대로 병력을 보완했다. 옛날 장군들이 거느렸던 호위병들을 상설근위대로 개편하여 로마와 이탈리아 여러 도시에 주둔시켰으며, 국내 질서를 유지하고 교역을 원활히 하기 위해 훌륭한 도로망을 건설했다. 또한 지중해를 경비하기 위해 효율적인 함대를 조직했다. BC 28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최초의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인구조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치세에 2번 더 실시되었다. 이들은 또한 원로원 의원을 1,000명에서 고분고분한 사람들 800명(나중에는 600명)으로 줄였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 의장에 임명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원인이 노골적으로 권력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그 자신이 내전을 종식시킨 영웅으로서 지배계급의 환영을 받기 위해서는 공화제로 복귀를 공개 선언함으로써 독재권력을 위장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BC 31~23년 그는 콘술을 연임하여 권력의 헌법적 기반을 유지했으나 BC 27년 1월에는 '국가를 원로원과 국민의 자유 재량에 맡김으로써' 공화제를 회복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동시에 그는 스페인과 갈리아 및 시리아로 이루어진 행정구역(속주)을 10년 동안 보유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이 세 지역은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나머지 속주는 이전의 공화제 때처럼 원로원이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옥타비아누스는 여전히 콘술이나 대도시 공직자들의 임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듯이 속주총독들의 임명에도 다소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이런 조치를 취한 지 4일 뒤 그는 율리우스의 양자가 되었을 때 얻었던 카이사르라는 성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었다. 고대의 종교적 의미를 가진 이 호칭은 어원으로 보면 '아욱토리타스'(초법적 권한)나 고대의 '점술'(augury)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여겨진다. '아우구스투스'는 종종 '후마누스'(인간)와 대조를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채택한 것은 자신이 헌법을 초월해 최고의 우월성을 지닌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었음을 교묘하게 보여주려는 시도의 하나였다. 그는 또한 옛 이탈리아의 많은 종교의식을 되살리고 수많은 신전을 복구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옛 종교에 대한 애국적 존경심을 보여주었다.

  많은 국경지역에서는 정복전쟁이 계속되었다. 그동안 다루기 어려웠던 알프스 부족들이 투항했고(BC 25), 갈라티아(소아시아 중부)가 로마에 병합되었으며 마우레타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몸소 갈리아를 방문했고, 건강이 허락할 때까지 스페인 원정을 지휘했다. BC 23년에 그는 다시 병에 걸렸는데 이번에는 죽음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온갖 음모에 대한 보고가 날아드는 가운데 그는 새로운 헌법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콘술 연임을 끝내는 대신 절대권력(imperium majus)을 장악했다. 이 권력은 그를 식민지 총독들보다 높은 지위로 끌어올렸다. 공식 화폐나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에는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는 이 권력을 주로 비상시와 개인적 방문 때 행사할 작정이었다. 또한 이미 호민관의 특권 중 일부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종신 호민관(tribunicia potestas)의 권한도 받았다. 이제 그가 장악한 절대권력은 실제적인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원로원을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용한 것은 호민관이라는 공직이었다. 호민관은 원래 해마다 선출되는 '평민'의 옹호자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종신 호민관인 그는 '민주적' 분위기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재판 상소권을 크게 확대함으로써 좀더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이미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아그리파도 총독보다 더 높은 지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아마 자주 병석에 눕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었을 때 군대를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보다 앞서 그의 젊은 조카이자 딸 율리아의 남편이며 왕위계승 후보자였던 마르켈루스가 죽었다. 같은 해인 BC 23년에 아그리파는 '프린켑스' 대리가 되어 동부지역으로 파견되었고, 2년 뒤에는 율리아의 2번째 남편이 되었다. 한편 아우구스투스는 시칠리아·그리스·아시아를 여행했다(BC 22~19). 그가 가는 곳마다 중요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특히 BC 20년에 파르티아와 협정을 맺어 아르메니아를 보호령으로 삼게 되었고, 파르티아 군대가 33년 전에 크라수스에게서 빼앗은 군기들을 돌려받았다. BC 19년에 아그리파는 스페인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해에 옥타비아누스의 권한이 약간 조정되어 그는 이탈리아에서 좀더 자유롭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결혼을 장려하고 간통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사치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법률을 제정했다. BC 17년에는 루디 사이쿨라레스(백년제)라는 고대 전통축제가 화려하게 거행되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과거에 지은 죄를 씻어주고 새 시대의 완전한 종교적 개막을 알리기 위해 마련한 의식이었다.

  프린켑스 자리는 자동으로 넘겨줄 수 있는 공직이 아니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딸 율리아의 두 아들을 입양한 것은 후계자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당시에 3세와 1세였던 이 아이들은 그때부터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아이들의 친아버지인 아그리파는 동부로 돌아갔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그의 권력도 함께 강해졌다. 그러나 이제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가 첫번째 결혼에서 낳은 그의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에게도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 이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및 바이에른을 이루고 있는 지역의 대부분인 노리쿰과 라이티아를 병합했으며, 그결과 제국의 국경을 이탈리아에서 도나우 강 상류로 확대했다(BC 16~15).

  원로원 자문위원회(consilium)가 아우구스투스의 원로원 관계 업무를 지원하기 위해 창설된 것은 아마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황제의 직속 보좌관이 늘어난 것도 그의 행정 부담을 가볍게 해주었다. 이들은 이제 여러 중요 직위에 앉게 된 기사와 해방노예로 구성된, 말하자면 최초의 공무원으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처음 나타나 점차 제국 행정제도의 본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로마와 이탈리아 및 제국 전체의 행정체계도 완전히 개혁된 모습으로 차츰 발전하기 시작했다. 행정체계의 개혁은 전례없이 효율적이었던 재정체계에 의해 가능해졌다. 이 체계는 아이라리움(중앙금고)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중앙금고는 지방금고와도 관련을 가졌으며, 그 관계의 자세한 내용은 지금도 완전히 파악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것은 황제가 중앙금고에 넣은 기금은 자랑스럽게 기록하면서도 금고에서 그에게 흘러나간 기금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재원의 바탕이 된 조세 수입에는 주요한 직접세인 인두세(tributum capitis)와 토지세(tributum soli)가 포함되어 있었다. 인두세는 모든 성인이 낸 지방도 있었고 성인 남자만 낸 지방도 있었다. 직접세만이 아니라 간접세도 있었는데, 간접세는 액수를 미리 예측할 수가 없었고 초기의 공무원들은 간접세를 다룰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징수 업무를 과거와 마찬가지로 청부업자들에게 맡겼다. 공화국 시절의 관세는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관세율은 교역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낮아졌고, 아우구스투스가 이룩한 평화 속에서 교역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번창했다. 대규모 산업은 없었지만 상업은 로마 화폐제도의 광범위한 개혁과 확대로 큰 자극을 받았다. 곳곳에 자리잡은 수많은 화폐 주조소는 금화와 은화를 대량으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제국 홍보정책의 여러 측면을 반영하는 도안이 새겨져 있었다. 로마 시민이 거주하는 서부지역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아우구스투스가 제대군인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세운 것이었는데, 이런 곳에서는 현지의 화폐 주조소에서 생산한 동전으로 자체 수요를 충당했다. 동부지역, 특히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 도시들도 동전을 발행할 수 있었다.

  BC 12년에 레피두스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마침내 그뒤를 이어 로마 종교의 공식 수장인 대신관이 될 수 있었다. 같은 해에 아그리파도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딸이자 아그리파의 미망인인 율리아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그후 3년 동안 티베리우스는 전장에 나가 판노니아(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지방을 진압했고, 그의 동생 드루수스는 라인 강을 넘어 엘베 강까지 진격했으나 BC 9년에 게르마니아에서 죽었다. 이듬해에는 지난날의 조언자였고 유명한 문학 후원자인 마이케나스까지 세상을 떠났다. 티베리우스는 BC 6년에 지위가 높아져 장인의 호민관 권한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의붓조카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질투 때문에 로도스 섬으로 은퇴해버렸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이듬해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가 '국부'(pater patriae)라는 최고의 칭호를 받은 BC 2년에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동생 루키우스도 똑같은 찬사를 받았다. 가이우스는 동부로, 루키우스는 서부로 파견되었지만 둘 다 곧 죽었다. 티베리우스는 AD 2년에 집으로 돌아왔고, AD 4년에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양자로 삼으면서 그에게 동생 드루수스의 아들 게르마니쿠스를 양자로 입양할 것을 요구했다. 티베리우스는 명성을 제외한 모든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거의 동등한 권한을 누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이제 나이를 느끼기 시작했지만 티베리우스와 제휴한 이 시절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과감하게 행정을 혁신하고 AD 6년에 유대를 병합했으며(속국 유대의 군주 헤로데 대왕은 10년 전에 죽었음), 로마에 치안 임무를 맡은 기동부대를 창설했다. 7년 뒤에는 정규 경찰력(cohortes urbanae)으로 기동부대를 보완했으며, 군인의 퇴역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해 군대 금고(aerarium militare)를 창설했고, 그때까지 수시로 임명하던 도시 장관(praefectus urbi)을 상설직으로 바꾸었다(AD 13). 같은 해 아우구스투스의 권한이 10년 더 연장되었는데 이것은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을 지배하는 동안 줄곧 되풀이되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헌법상의 모든 점에서 아우구스투스와 동등한 존재가 되었다. 4월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베스타 신전에 유언장을 맡겼다. 여기에는 제국의 군사적·경제적 자원에 대한 요약(breviarium totius imperii)과 ' 신성한 아우구스투스의 업적'(Res Gestae Divi Augusti)으로 알려진 정치적 유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정치적 유언장의 사본은 로마 신전의 벽과 터키 앙카라의 아우구스투스 기념비에 잘 보존되어 있다. AD 14년에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왔다. 아우구스투스는 8월 19일에 죽었고, 9월 17일에 원로원은 그를 로마 국가의 수호신 명단에 올렸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의 제2대 황제가 되었지만, 제위 계승에 따르는 형식적 절차는 그 자신만이 아니라 원로원에도 골치아픈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최고 권력'은 법적으로 말하면 상속할 수도 없고 지속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도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추가 칭호로 채택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행정의 천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가 제국 전체의 모든 분야에 걸쳐 실시한 방대한 개혁은 쇠퇴하고 있던 공화국을 새로운 군주제로 탈바꿈시켜 그후 수세기 동안 생명을 유지하게 했을 뿐 아니라, 편리한 교통과 번창하는 교역을 바탕으로 로마에 지속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문화 유산이 후세에 전달되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로마의 지배에 따른 평화'(Pax Romana) 덕분이었다. 그의 정치는 독재정치였지만 수많은 종류의 선전을 풍부한 상상력으로 재치있게 구사한 선전의 명수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에 지친 세대를 만족시켜줄 전통적 형식으로 그 독재정치를 교묘히 포장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는 베르길리우스·호라티우스·리비우스 등 역사상 최고 수준의 작가들로부터 찬양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아우구스투스에게 열광한 것은 로마의 서부, 즉 이탈리아가 로마 전체의 평화를 지배해야 한다는 아우구스투스의 확신 때문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리스와 로마 사이에 일종의 제휴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했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견해와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런 제휴관계는 그후 3, 4세기 뒤에야 성립되기 시작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이같은 편견은 그리스 문화를 알고 감탄하게 됨에 따라 점차 바뀌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시골의 작은 도시 출신인 그의 태생에 바탕을 두고 형성된 것이었다. 그가 고대 종교에 대해 애국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애착을 느낀 것이나, 엄격한 사회정책을 취한 원인의 일부도 이때문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교양인으로서 브루투스를 비난하는 소책자, 철학을 권고하는 글, 자신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 드루수스 전기, 시, 경구 등을 비롯한 수많은 글을 썼는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의 성격은 흔히 초기에 보여준 잔인함과 후기의 온화함으로 구별된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는 잔인하게 굴 필요가 거의 없었을 뿐이었고 필요할 때, 특히 진위가 의심스러운 음모를 진압할 때면 여전히 잔인성을 발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의 가정생활은 검소하고 소박했다. 가족 중에 그가 후계자나 조력자로 내정한 사람이 잇따라 죽은 것은 그에게 많은 슬픔과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헌신적이었지만, 다른 로마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내에게 한결같이 성실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그의 편지들은 가족과 친척에 대한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엄하고 단호한 면도 있어 간통을 했다는 이유로 딸 율리아를 추방했다. 아그리파와 율리아 사이에 태어난 딸도 같은 이유로 추방했으며, 그녀의 오빠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도 추방했다. 나중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죽었을 때 황제의 지시에 따른 암살일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나 입증되지는 않았다.

  그의 신체조건은 별로 좋지 않아서 온갖 병에 시달렸고 주기적으로 재발했다. 사실 젊은시절에 그가 병마를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불굴의 의지력 덕분이었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고 누구도 추종할 수 없는 그의 업적을 생각해보면 젊은시절에 그가 이처럼 병약했다는 것은 놀랍다. 전기 작가인 수에토니우스는 그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잘생기고 평생 기품을 잃지 않았지만, 겉모습을 치장하는 것은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대화를 나눌 때나 침묵을 지킬 때나 차분하고 온화했다……그는 반짝이는 맑은 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이 눈에 일종의 신통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누군가를 날카롭게 쳐다볼 때 상대가 마치 눈부신 햇살을 받은 것처럼 고개를 떨구면, 그는 몹시 즐거워하곤 했다. 그의 치아는 사이가 넓게 벌어지고, 크기가 작았으며, 별로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머리는 약간 곱슬거렸으며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눈썹은 양쪽이 거의 맞닿아 있었다……안색은 검은색과 흰색의 중간이었다. 키가 작았지만 탄탄하게 균형잡힌 훌륭한 몸매가 이 결점을 감추어주었다. 그보다 키가 큰 사람과 나란히 섰을 때만 그의 키가 작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용모는 당시의 가장 훌륭한 조각가인 그리스인들과 그리스화한 동부사람들에게는 신이 보내준 선물로 여겨졌다. 그들은 그의 얼굴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황제의 전형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이다. 당시에 만들어진 아우구스투스 흉상은 그의 동전에도 그대로 새겨졌으며, 이탈리아 양식과 고대 그리스 양식이 신중하고 훌륭하게 융합한 문예부흥의 일부를 이루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걸작 건축물도 수없이 세워졌다. 오늘날에도 로마에 있는 마르켈루스 극장과 거대한 아우구스투스 광장 유적에서 그 위풍당당한 모습과 고전적인 순수함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로마 이외의 지역에도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기념물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알프스 산맥 양쪽에는 현지 부족의 복종과 충성을 찬양하는 기념비들이 서 있고, 페르시아 만 연안의 세구시오(수사)에는 우아한 아치 문이 남아 있으며, 라튀르비에는 꼭대기에 원기둥 모양의 드럼을 얹고 돌을 네모나게 깎아 만든 전승기념비가 서 있다. 로마 교외의 프리마포르타에 있는 리비아의 저택은 당시의 예술이 모두 격식을 차리거나 웅장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아우구스투스 자신은 개인적 사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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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 2012-08-10 (금)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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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그 나물에 그 밥 김정은 원수칭호 dkp 07-19 849
201  도연명때문에 깨달았음을 모른 혜원법사 dkp 07-19 879
200  '깨달음'은 누구에게나 하루에 몇차례 온다 dkp 07-19 807
199  비아냥대자 공자, 이퇴계가 dkp 07-19 804
198  차 뒤에 숨어서 오줌누는데 하필 ~ dkp 07-19 954
197  이학박사 모둠 며누리밑씻개, 큰개불알꽃 dkp 07-19 1182
196  열당 글에 대한 점수매기기 dkp 07-19 726
195  개그 공화국 <펌> dkp 07-19 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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