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에 쓴 글입니다. 설날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인상이 안 좋지만 일본인들 사이에 몇 백년을 두고 인기를 굉장히 모으고 있는 사나이가 있다. 도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바로 그 사람이다. 작은 키 못생긴 얼굴에 안짱다리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당번병이었다가 차츰 출세하여 오다 휘하의 일 군(軍)을 지휘하다가 상전 오다가 암살 당한 후 정권을 잡아 일본을 통일하였다.
히데요시가 아직 하급 장교였던 시절 어느 새해 축하연에서 보병의 창술에 관한 논쟁이 벌어졌다. 모처럼 주군(主君) 앞에서 한잔씩 걸쳤겠다 모두들 흥겹고도 한편 긴장된 기분에 논쟁에 열을 올렸는데 당시 창술의 대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몬도가 짧은 창의 이점을 내세우면 히데요시는 긴 창의 이로운 점을 주장하여 서로간에 양보가 없었다. “그렇다면” 양쪽의 주장을 흥미 있게 듣고 있던 보스인 노부나가가 결론을 내렸다. “너희들 각기 보병을 50명 씩 거느리고 한 판 붙어서 승부를 가려라. 날짜는 3일 후이다. ”
몬도는 보병 50명을 엄선하여 눈뜨자마자 구보부터 시켜서 기본 체력을 단련시키고 짧은 창을 쓰는 요령과 실제를 한 밤중까지 맹훈련을 시켰다. 구보에 낙오하는 병사는 몽둥이로 찜질을 하고, 개인 기본기가 서툴면 몇 십번이고 반복 훈련을 시키는 한편 진용을 짜서 공격과 방어를 하는 전술 훈련을 땀투성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거듭하였다. 남들 다 노는 정초부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모두들 마음 속에 불만이 가득한데 날씨는 춥고 몸은 고달프니 만사가 귀찮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처음부터 병사 훈련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주군 댁 주방장을 잘 구슬려서 설날 잔치 후에 남은 술과 음식을 얻어다가 병사들에게 먹이면서 위세 좋게 선동한다. “걱정 없다. 실컷 마시고 놀아라. 시합 날 내가 신호를 하면 모두 목청껏 함성을 지르면서 뛰어들어서 녀석들 대가리를 두들겨 패는 것이다. 하여간 녀석들이 가깝게 오지 못하도록 긴 창을 휘둘러라.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이긴다. 이기면 우린 또 근사하게 한잔하는 것이다.” 몬도의 병사들이 연 삼일간 코피를 쏟으면서 훈련하는 동안 히데요시는 술판을 연일 벌리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그리고 막상 시합 날 승부는 너무도 간단하게 끝났다. 몬도의 짧은 창 부대가 멍하고 있는 사이에 히데요시의 긴 창 부대가 고함을 지르고 달려들어서 때리고 찌르고 하여 몬도의 보병 50명을 아주 곤죽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처음부터 사기가 떨어진 데다가 제 몸 하나 가눌 수 없이 피곤한 몬도의 병사들은 이긴 다음 축하주 한 잔 멋있게 하자고 기가 펄펄 나서 설쳐대는 히데요시의 병사들을 당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백에 한 둘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항상 싸우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기는 측은 이길 수 있는 만반의 조건을 충분히 마련해 놓고 전쟁에 임하지만 지는 쪽은 항상 결정적인 허점을 가지고 이를 상대하기 때문이다. 짧은 창은 좁은 공간의 단접병전에서 유리한 무기이지만 넓은 장소에서 특히 기병을 상대로 할 때는 긴 창이 위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긴 창이나 짧은 창은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는 것이지만 히데요시는 우선 시합 장소가 보나마나 연병장이리라는 것을 착안하여 긴 창의 이점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돋구어서 승리를 유도하였던 것이다. 확실히 히데요시는 먼저 이겨놓고 싸움에 임한 것이다.
1996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제까지 우리는 몸으로 때우는 장사, 아니면 과도한 권리금으로 허덕일 수밖에 없는 무모한 사업을 코피를 쏟아가며 매달렸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미국 주류(主流)사회에 참여 못하는 것을 말 할 것도 없고 타 민족과도 담을 쌓고 지낸다. 그러니 지역 컴뮤니티 행사 등에도 나 몰라라 등을 돌리고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새해부터 이겨놓고 하는 싸움을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장경제 이론이나 마케팅의 원리 같은 것 모른다고 가게 매상에 당장 영향받는 것 아니다. 그리고 영어가 어디 하루 이틀에 될 일인가? 이겨놓고 싸우려는 터에 초조한 맘가짐은 절대 금물이다. 우선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내가 맡은 직종, 내가 하는 사업을 위해서 한번 신바람 나게 뛰어보는 것이다.
고개를 쳐들고 가슴을 펴고 그리고 한 번 크게 웃으면서 병자년(丙子年)을 시작한다. 우리 이민 일세들이 건강하게 뿌리를 박아야 우리 아이들이 강건한 줄기가 되어 꽃을 피우고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 아닌가?
1996년 1월 9일 중앙일보 김정수 칼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