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을 향해 수양하는 스님[선생님]이 있는 곳을 '절'(寺)이라 부르게 된 줄로 압니다.'절'이란 순수한 우리말. 사찰로서의 '절'은 수행과 의식을 행하는 방편.
부처님이 '세상에 스님(master)이 끝났다. 아난다(Ananda)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따라서 스님과 인사하여도 부처님께 드리는 '절(拜)'과 다릅니다.
'절하면서' 어리석음을 자비로우신 부처님께 선물하는 것.
내 마음을 부처님께 던져버리려고 오체투지한 것이 절하는 목적.
스님은 신자와 더불어 부처님께 절하며, 부처님과 나란히 앉아 신자의 절을 받지 않는 줄로 압니다.
존자(尊者), 장노(長老)가 달을 가리키는데, 그를 따라 달을 보는 사람은 부처님을 만날 것이고, 손을 보는 사람은 건물을 지을 겁니다.
사찰은 방편. 법화경 비유품(比諭品) 말씀대로 불난 집안에 있는 어린애를 부르며 보여주는 장난감.
불난 집은 세상, 장난감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수단(compassionate device).
결론적으로 김민수 '국어학개론'에서 '절'이란 일본어 '테라'(寺院)의 발음을 따왔다는 말은 무리인 것.
까닭은 '테라'라는 의미를 '고요함', '화살(矢)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테라'라는 발음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켈트(celtic)어 '언덕'(hill), 라틴어에서 '땅', '땅을 맡은 여신', 일본어에서 '사찰'이기에 우리 말 '절'과 발음이 영 다르기 때문.
또한 삼국유사 신라 본기(本記) 제 19대 눌지왕 때 '아도기라(阿道基羅)' 조(條)에 『북방의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를 거쳐 신라에 입국하자 일선군(一善郡)의 '모례'(毛禮)가 토굴을 만들어 그를 감추어 편안하게 해주고 있었을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이 의복과 향(香)을 보냈는데...』를 읽은 김정빈이 '불교 이야기'에서 '모례'가 '털례'로, '털례'가 '털'로, '털'이 '절'로 발음이 발전했다는 가설 또한 억지스러운 궤변일 겁니다.
그러면 교회의 낱말 뜻은;
'하느님의 백성'이란 단어가 70인이 번역한 그리스 성서에 '불리어 나온것'(ecclesia. ek-'out', kallein. 'call')으로 번역되어 '하느님 백성의 계승자 사제'를 포함한 뜻도 되는 라틴어(ecclesia), 프랑스어(eccle'siastique)를 경유, 영어로도 되었다고 합니다.
'Church'란 의미는 '주님'이란 그리스어 'kurios. 주님의 집(Lord's house)'.
이 발음이 잘못 전해져 서부 게르만의 'Kirika 킬리카', 독일어로 'kirche 킬케'. 이 글자를 꾸어 잘못된 발음(誤音)의 영어로 낙착한 발음이 'church(처~치)'.
따라서 믿는 이들의 공동체였지 부동산 건물이란 의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열두 제자가 하늘을 가리키는데 하늘을 우러러 보는 이는 예수님을 만날 것이요 그 손가락을 보는 이는 건물을 지을 겁니다. 교회건물은 방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