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신문사에서 「내 마음의 명문장」이라는 기획시리즈를 연재하면서 저에게 원고를 청탁해왔습니다. 오랜 독서 생활 속에서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명문장을 골라내, 그 원문을 글의 머리에 싣고, 그 글이 써지게 된 배경이나 그 글이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가를 요약해서 적어달라는 청탁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청탁을 받고 꽤 많은 시간을 고민했습니다. 원고 청탁자는 물론 저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의당 다산의 글에서 명문장을 골라내리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다산의 글이야 명문장이 수두룩함을 잘 알고 있는 저로서 당연히 다산 글을 생각했지만, 일반의 생각과 일치하는 글을 고르는 것은 다소 싱거운 일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어, 고심 끝에 내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고 있던 매천 황현 선생이 망국의 서러움에 목숨을 끊으며 남겼던 ‘유서(遺書)’의 문장을 택하여 신문에 실었더니, 독자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반응이 상당했습니다. 그렇다고 다산의 명문장 등을 그냥 숨겨놓을 수만도 없어, 그때 선택의 대상으로 마음을 사로잡던 다산의 명문장을 소개하렵니다. “내 집 문 앞을 지나면서 들르지 않는 것이야 이미 상례(常例)가 되었으니 원망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의 괴로움 중에는 남들은 기뻐하는데 자신만은 슬픔에 빠져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고, 온 세상의 한스러움 중에는 나야 그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過我門不入 已成法例 不可怨也 但天下之苦 未有甚於人歡而我悲 天下之恨 未有甚於我思而人忘 斯不可不知也)(「答呂友濂東植」) 외롭고 쓸쓸한 유배살이 18년, 얼마나 심한 ‘절대고독’에 시달렸던 다산인가요. 그렇지만 해배되고 난 뒤의 고독은 아마 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음을 다산의 편지 문장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랜 유배생활, 독방의 오랜 감옥살이 등의 인간적 아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해낼 수 없는, 경험자의 핍진한 실토로 보여집니다. 모두가 기쁠 때야 기쁨이 상승되지만 모두가 기쁠 때 혼자만 슬프다는 것은 상쇄할 수 없는 비애가 가슴을 찌른다는 것을 다산의 고독이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여동식(呂東植, 1774〜1829)은 자가 우렴(友濂)이고.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참의‧대사간을 지낸 선비로 글과 시를 잘해, 이름이 높았는데, 다산의 고향 마을 건너편인 양근(楊根:지금의 양평)에 살았기에 서울 출입에 반드시 다산 마을을 지나게 되어있는데, 유배에서 풀렸지만 복권이 되지 않은 다산을 꺼려해,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는 때가 많았나 봅니다. 그런 때의 다산 편지가 바로 위의 문장입니다. 물론 세월이 흐른 뒤에는 여동식과 형인 여동근(呂東根) 형제는 다산과 터놓고 지내면서 많은 시를 짓고 글을 논했습니다. 참으로 가까운 사귐을 이어갔습니다. 남은 기쁜데 나는 슬프고, 나는 그를 사모하는데, 그는 나를 까맣게 잊고 있는 비애의 아픔, 실사구시적 다산의 문장은 명문장으로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석무 드림
---- Re: 다산의 명문장(名文章)
프란치스코 교황이 가톨릭 순교자 124명을 시복함에 이르러 가볍게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사연이 있습니다.
정조가 승하하고 다음 해의 신유박해 순교자 53명, 기해박해 37명, 병인박해 20명, 신유박해 이전 정조 15년의 신해박해 등 순교자 14명이 복자로 시복(諡福)되는데 종교적대역죄와 배교 때문에 이미 알던 사람과 의절(義絶)된 다산의 절규.
같은 형제간에 자손을 남기는 유일한 길로 살겠끔 된 그 다산의 사연을 분석해보면 매우 안쓰러운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급진주의적 선교사 뮈텔 주교, 모방, 샤스탕,....의 돈오(頓悟)포교 때문에 무고한 순교자를 남겼다고 여깁니다.
천천히 교리를 주입시키지 않고 수 천년 내려온 토속신앙과 유교사상의 조상제사를 하루 아침에 뿌리뽑을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여 지하교회(카타콤바)로 숨고 목 잘라 죽게 됬고 목 매달아 죽고 귀양보내어 죽게 된 것.
그 대대로 내려온 조선시대 정치명분론(政治名分論)은 경국대전에서 밝힌 정명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치란 바른 것, 인간의 차별성은 당연하고 각자가 합당한 덕을 실천하는 것.' 그러므로 『대명률강해』 <명례률>, <상사소불원>을 보아도 초대교회식 전도자를 처벌할 항목은 없으나 당쟁에 얽혀 명분적으로 무자비하게 죽이고 때를 잘못 택한 선교사들에 의하여 같이 죽게 만든 것.
1. 그 종교의 자유에 대하여 경국대전에는 처벌하는 법률조항이 없으나 <대명률강해>에서 '십악(十惡), 붕당결성' 항목을 포괄적으로 확대해석한 당파적인 정략으로 신해박해(1791)가 비롯된 것 같습니다.
2. 중국에서는 보유론적 점수, 조선에서는 돈오포교 그 무슨 말세가 일어난다고 서둘러 요령부득의 이런 현상을 조선에 유발시킨 선교사들의 전도(傳道)방법의 시행오차.
얀센파의 파스칼(1655)을 울게했던 깐깐한 예수회교파일지라도 마테오 리치는 같은 예수회 소속이지만 북경에 도착하자 선교방식을 달리하여 공자와 조상 제사를 인정하고 도와준다는 보유론적(補儒論的) 포교방식(1601)을 채택하여 당국정치가를 곤혹스럽게 하지 않으며 유교에서 서서히 기독교로 깨치게 하는 점수법(漸修法)을 중국에서 행합니다.
더구나 중국에는 이미 기독교에 뜸이 들어 있섰습니다. 당태종 정관 9년(635)에 예수회 이전의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삼위일체를 부인하지만 예수님은 외형적 결합에 의해 신성과 인성이 있다는 교리, 그러나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님으로 부르는 천상모후 교리를 반대한 경교(景敎)가 들어와 원나라 말기 때까지 있섰읍니다.
그러나 그 예수회 소속 마테오 리치는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손에 서구문물인 베네치아 세계지도(1603), 프리즘, 해시계, 자명종을 전하고, 중국에서 세계지도(만국여도)를 작성하고 우리나라에 망원경(1631)을, 소현(昭顯)세자에 의해 지구본(여지구)이 소개된(1645) 뒤에는 삼위일체 교리, 조상제사 철폐 교리로 급작스런 돈오(頓悟) 포교가 강행됩니다. 이 때에 다산은 서학의 새로운 렌즈를 얻어 근시와 난시의 이유를 밝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과학과 기독교는 상관이 거의 없습니다. 앞 선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59년 전에 파문당한 갈릴레오의 교적회복을 공식선언했지만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달을 관찰하고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을 확인했다고 교황 우루바노 8세에 의해 파문된 걸로 볼 때에 마테오 리치가 들여온 서구문물은 가톨릭 교회와 아무 상관이 없지만 그는 이 것을 실학자들에게 크리스챠니즘 도구로 교묘히 이용한 겁니다.
이와 별도로 안정복은 천주교에 매우 비판적이어서 권철신(權哲身)에게 나중에 패가망신하지 말라고 충고(1784)했고, 당시의 재산 채제공(蔡濟恭)에게 서신을 보내어 천주교를 배척하는데 미온적임을 꾸짖으며 종교로서의 서학을 배척할 것을 강조(1786)했읍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 선교사들이 고유한 전통을 무시하고 갑자기 깨우치게 하려는 돈오법(頓悟法)을 채용합니다. 이로써 마치 불교전파 때에 이차돈의 죽음처럼 윤지충이 별세한 모친상에 신주를 불태워 유교를 해쳐 최초로 순교.
이 번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자로 시복할 우리나라 123명 중에 다산 정약용은 배교했다(1799)는 이유를 들어 결국 빠진 것 같지만 다산은 <조선복음전래史> 저술을 시작으로 하여 배교(背敎)했다가 크게 반성하고(1811) 교회부흥운동에 참여하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 고신극기(苦身克己), 묵상으로로 살았다고 달레(Dallet)의 <한국천주교사>에 기록됩니다.
그 다산은 장기에 유배(1801)되었으나 황사영 백서(帛書)가 들어나자 서학도(西學徒. 실학자)가 분명한 것이 들어나 다시 강진으로의 유배생활을 끝낸(1818년) 후에 생을 마감하면서 마지막 의식의 임종으로 유방제(劉方濟) 신부로부터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았습니다.
이에 가톨릭계는 여유당전서를 검토하여 다산과 천주교와의 관계를 재규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로만 가톨릭 입장에서는 배교했다가 다시 귀교(歸敎)하면 받아주는 것이 도나티즘(Donatism AD 347) 논쟁의 결론이었기에 다산이 꼭 시성되어야 한다기보다는 처음과 끝이 평신도 자격의 다산의 신앙심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은 1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거스틴[아우구스티노]이 도나투스를 반박하여 해결을 보기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평신도를 폄훼하는 것으로 이 것은 한국 가톨릭교회가 한참 온당치 못할 겁니다.
다산의 평신도 신분을 찾아줘야 마땅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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