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담에 다시는 먹지 않을 꺼라고 물 마신 후 오줌을 누어버렸으나 언젠가 후일 다시 그 곳을 지나갈 날이 있겠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은 후에 진흙탕에 다시 뒹굴게 되는 날이 온다는 말이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번 다시 안볼 것처럼 '나는 산골짜기 물처럼 맑은 마음으로 은거한다'는 의미로 청은(淸隱)이라는 아호(雅號. pen name)를 가진 김시습이 절깐 부처님의 설법이 이치에 않맞고 황당하다며 염라대왕이 사는 곳에서의 대화록을 적은 문장 <남염부주지>를 남겼지요.
그렇게 불교말씀을 헌 신짝처럼 버렸던 그가 쉬흔 아홉살로 이 세상을 하직할 때에 자기를 화장하지 말며, 백마강 근처 부여 성주산(聖住山)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하기를 원한다면서 그의 아호는 '한 평생 빚만 지고 간다는 세상의 혹'이라는 의미로 췌세옹(贅世翁)으로 바뀝니다.
그 김시습의 행장은 단종애사에 소상히 그려져 있고, 세상의 부귀와 공명을 등진 채 산수풍월을 벗삼아 전국의 웬만한 곳이라면 그의 발부리가 닿지 않은 곳이 없섰다고 하지요.
그의 인품이 이렇듯 청렬고고(淸洌高孤)했지만 하필이면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이 사람을 속이겠끔 황탄하다던 절을 찾아와 죽으러 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1480년 경 성종 때에 음애(陰崖) 이 자(李 耔) 선생이 그에 대해 '자취는 불(佛교)이고 행실은 유(儒교)라'고 총평했습니다.
그의 유적은 절 뒤의 조그마한 암자에 초상화, 마을 입구에는 사적을 기록한 빗돌만이 초라하게 서 있을 뿐, 그가 아무리 학문이 깊고 고결총명하드라도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인간의 부족함이라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열린마당에 다시는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서하며 댓글에 욕설을 퍼붓고, 내 글이라고 마음대로 넣다 뺐다 넣다 뺐다도 말고, 이미지에 오줌을 누거나 침을 뱉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혹시 잠언 26:11, 베후 2:22, 예전 崔南伯, 장편당선작품 植民地(137) 연재될 때의 횡설수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