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조부의 부역으로 인한 연좌제로 자손이 영향받을 이치가 없어졌지만 심적으로야 고통이 있겠다 싶다. 이를 이해한다.
친조부님이 이완용이 아니지만 근 500여년 전에 갈라져 나온 지파라 하여도 같은 항렬을 쓰게 됨을 유감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다고 을사오적신 이완용을 미화할 수야 없잖겠는가.
이완용은 열사 李在明이 거의 죽을 정도로 자객노릇을 했음에도 의료기술의 덕으로 구명될 수 있었지만 李君은 제 명을 살지 못했고 이완용이 제 명을 살다가 묻힌 후에 직계 자손이 통한에 못 이겨 1979년에 무덤을 파헤쳐 버렸는데(파묘破墓) 그 관 속에서 금반지 두 개가 나온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병도가 시켜서 1미터 59센티미터 길이의 관 뚜껑을 회수해간 것.
그의 아들인 뉴라이트 李長茂가 서울대 총장을 역임했던 처지에 '이완용을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 '한 민족을 근대화로 이끌었다', '정신대 위안부는 돈 벌기 위해 몸 판 거다'라고야 할 수 없겠다 싶다.
그의 항렬은 오행(五行)에서 십간(十干)으로 변한 호(鎬), 원(遠) ↓ 용(用): 이완용 ↓ 구(九), 병(丙): 이병도 ↓ 녕(寧), 무(茂): 이장무, 이건무, 이어령(이어녕이라고 부르기를 원함) ↓ 범(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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