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세계적 와인들 격침… 비냐 에라주리즈社의 성공 비결
땅을 놀게 하라
8분의 1만 포도 농장으로 나머지는 자연 위해 비워
"동물·곤충·미생물들이최고의 포도 만들어주죠"
남이 안 심는 곳에 심어라
산비탈·계곡에 포도 심어 평지 경작 프랑스와 달라
2004년 칠레 와인 회사 '비냐 에라주리즈(Vina Errazuriz)'가 독일 베를린에서 연 와인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상표와 연도를 모르는 채 시음만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이 와인회사의 '비녜도 차드윅' 2000년산과 '세냐' 2001년산이 샤토 라피트 2000년산, 샤토 마고 2000년산 같은 최고의 프랑스 와인을 제치고 1·2위를 차지한 것이다. 프랑스의 2000년산 와인은 유명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가 100점 만점을 준 '사상 최고의 와인'이다. 이후 에라주리즈는 브라질과 일본, 홍콩, 한국 등지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계속했고, 그때마다 에라주리즈의 와인이 1위 또는 2위에 오르면서 '칠레의 아이콘 와인'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29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북쪽 100㎞에 있는 '비냐 세냐(세냐 와인 농장)'에서는 이 와인 회사가 세운 '바이오 다이내믹 센터' 개원식이 열렸다. '바이오 다이내믹(bio dynamic)'이란 태양과 달의 운행에 따른 농사력에 입각한 농법이다.
350㏊(약 106만평)에 이르는 '비냐 세냐'는 고작 42㏊만 포도밭으로 경작하고 나머지는 자연 상태로 보존하고 있었다. 전체 면적의 8분의 1만 농장으로 쓰는 것이다. 세냐보다 한 단계 아래 와인 '아르볼레다' 와인 농장인 '비냐 아르볼레다' 역시 총 면적 1047㏊ 중 113㏊만 포도농장으로 쓰고 있었다.
- 칠레 산티아고에서 북쪽으로 100㎞쯤 떨어진 아콩카과 계곡의 ‘비냐 세냐’전경. 프랑스 포도밭과는 달리 산비탈에 포도나무를 심은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 비냐 에라주리즈 제공
"그것이 바로 바이오 다이내믹의 기본입니다. 총 면적의 최대 25%만 경작지로 쓰고 나머지는 동물이나 곤충, 미생물들이 그대로 살도록 놔두는 거죠. 미경작지를 훨씬 넓게 보존하면서 '생태 통로(natural corridor)' 역할을 하게끔 합니다. 동물의 분뇨가 자연스레 거름이 되고, 생태계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농약을 칠 필요도 없는 거죠." 이 회사의 마케팅 디렉터인 카를로스 데 카를로스의 설명이다.
에라주리즈 농장들의 특징은 대개 평지가 아니라 산비탈에 있다는 것이다. 태평양에서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산(해발 6959m)으로 이르는 아콩카과 계곡에 농장들을 배치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해발 100~300m 높이 비탈에 포도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비탈에 포도나무를 심는 대신 남향이나 서향 비탈에 집중합니다. 그러면 가장 일조량이 많을 때 평지보다 훨씬 더 강한 햇볕을 받게 되지요. 그것이 평지에 포도를 심는 프랑스와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비냐 세냐의 와인 메이커(주조 책임자)인 프란시스코 배티그의 설명이다.
안데스 산맥이 국토의 동쪽을 세로로 가로막고 있는 칠레에서 아콩카과 계곡은 유일하게 내륙으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 때문에 선선한 날씨와 풍부한 일조량, 바람이 많아 포도나무 경작에 뛰어난 조건이었다. 특히 소비뇽 블랑이나 샤도네이, 피노 누아 같은 포도 품종에 적합한 날씨와 지형이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곳에 포도농장을 개간한 에라주리즈는 '세냐'와 '아르볼레다'라는 프리미엄 와인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오전에는 1995년부터 2010년까지 16년간 생산된 '세냐' 16잔을 맛보고 점수를 매기는 이벤트가 열렸다. 세냐 2007년산이 1위, 2010년산이 2위, 2011년산이 3위를 기록했다. 영국에서 온 와인 저널리스트이자 스스로를 '와인 사색가(The Wine Thinker)'라고 소개한 로버트 조지프는 "세냐 같은 와인 한 잔이면 얼마든지 와인 애호가에서 와인 사색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